[성지순례 41 : 예루살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탄생한 도시

분쟁 끝이지 않지만 신성시 되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
통곡의 벽·성묘교회·오마르 사원 등 사적 많아 순례 객 더해

기독타임스 | 기사입력 2021/05/10 [15:37]

[성지순례 41 : 예루살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탄생한 도시

분쟁 끝이지 않지만 신성시 되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
통곡의 벽·성묘교회·오마르 사원 등 사적 많아 순례 객 더해

기독타임스 | 입력 : 2021/05/10 [15:37]

▲ 예루살렘 배경으로 성지순례단이 한자리에 모였다.     ©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탄생한 도시이며 서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신성시되는 곳 예루살렘.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만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분쟁이 끝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이다. 

동부는 요르단령이며, 서쪽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기독교도·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예루살렘은 사해(死海)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다.

지중해성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를 겪는다. 

동(東)예루살렘에는 사적(史蹟)·성적(聖蹟)이 많으며,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聖墓)교회(기독교), 오마르사원(이슬람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해마다 전 세계에서 이곳을 찾는 순례자와 관광객이 많다.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이며, 정부 청사와 히브리대학교·국립박물관·미술관 등이 있다. 또 금속·담배·플라스틱·신발·전기기구 공장 등이 있다.

 

▲ 예루살렘 성벽에 세워진 다마스쿠스 문     ©

 

△예루살렘 역사

여기서 예루살렘 역사를 간략해 보면, BC 3000년대 말경에 에브스(여부스)라는 가나안인(人)의 한 부족이 그 동부에 성시(城市)를 지어 거주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BC 2000년대 중엽부터 이집트의 파라오(王)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BC 1000년 무렵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뒤 헤브라이인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윗 왕이 에브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지금의 아크사 이슬람교사원이 있는 지점에 궁전을 지었고, 그 북쪽, 지금의 바위사원(쿠바트 앗사흐라)이 있는 곳이며 일찍이 다윗이 건립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제단 앞에 야훼의 성전을 건립하였다.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

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신(新)바벨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시민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 그 뒤 페르시아 왕 키루스(고레스)가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 뒤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로데스(헤롯)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야훼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왕 이래의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 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뒤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로데스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로데스가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 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통곡의 벽     ©

 

그 뒤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 야훼의 성전을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을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토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무함마드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제7천에 있는 알라의 앞까지 갔다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아크사의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 때에는 다윗이 제단을 마련한 곳에 바위사원을 건립하였다.

 

▲ 실로암 연못     ©

 

이때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서로 상대편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예외로는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1)이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몇몇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비잔틴제국의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099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성시(聖市)를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에서 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和議)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땅은 맘루크왕조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다마스쿠스 총독이 이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투르크령이 되고 난 뒤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 축조된 것인데, 투르크령 시대에는 차차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인구가 1만 1000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 예루살렘 거리로 순례자 일행이 골고다 를 오르고 있다.     ©

 

한편,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이 투르크에 압력을 가하여 이곳의 성지 보호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투르크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뒤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밸푸어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였으며, 아랍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이듬해 2월에 이스라엘국이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한 쪽을 영유하였는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하였다.

※ 예루살렘 순례는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편집국장 / 신춘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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