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성수부터 구제활동·가정예배까지… ‘말씀’따라 살았다<창간31주년 기획특집·종교개혁 505주년 기념 특집> 개혁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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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교자들이 매장된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스코틀랜드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오직 예수그리도만이 우리의 왕’이라는 언약도의 구호와 함께 종교생활의 자유를 주장하며 장로교 정치를 실현한 국가이다. © |
17세기 스코틀랜드 교회 생활
들어가는 말
청교도 운동과 언약도 운동이 동시대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17세기는 그야말로 영적 가치가 최고조에 달하였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잉글랜드에서 청교도들의 활동은 영국 전 사회의 얼굴을 바꾸었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종교적 활약상은 가공할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적인 세파에 좌우되는 아픔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들이 남긴 영적 유산은 지금까지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도들은 17세기 중반까지는 적어도 잉글랜드 청교도들과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661년 잉글랜드의 왕정 복귀 이후와 특히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1648) 이후 언약도들의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남과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이 그 동안 유지해 왔던 일치된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극단적인 노선을 견지한 순수한 언약도들에 의하여 장로교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그들의 수고와 순교의 피로 인하여 1688년 명예 혁명이후 장로회주의가 재형성되면서 스코틀랜드는 오늘날까지 장로교 국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에서 언약도들은 장차 견고하게 세워지게 될 장로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들이었고 국가와 정치 및 사회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 역시 막강하였다. 비록 그들에게 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의 문턱을 넘나드는 일들이 있었지만 혹독한 겨울철에 만발하게 된 그들이 보여준 은혜의 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도전과 감동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그들의 삶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는 것은 경건한 자가 점점 사라지고 의인을 찾기 힘든 우리 시대에 크나큰 도전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1. 교 회
17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성직자가 할 교회 행정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모든 원칙은 지역의 대 지주 혹은 토지 소유자들에 의하여 움직여졌다. 즉 그들은 주민들에게 집과 제분소 그리고 학교와 교회 및 목사와 목사의 사택과 생활비를 전부 제공하는 자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극도로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대지주의 손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목사들조차도 이들 후원자(patrons)들에 의하여 청빙되었고 교회 법안들이 그리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목사는 백성들의 영적인 문제와 그 밖의 많은 일들의 조언자가 되었다. 목사는 마을에서 가장 잘 교육을 받은 자였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성도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늘 모범을 보여야 할 자였다. 경건하여야 했으며 양떼들을 세심히 살필 줄 알고 친절한 목사는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목사는 장로들의 조언을 들었고, 장로들은 각 지역에서 선출된 덕망 있고 존경받는 자라야 했다. 장로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했고, 심방을 통해서 교구민들을 잘 이해할 줄 알아야 했으며, 공평하고 자애롭게 돌아보아야 했었다.
당회는 교인들이 교회당에 오는 것을 감독하였고 교회는 성도들을 깨우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종을 울렸으며 두 번째 종이 울릴 때에는 오전 예배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미 집을 나서 교회당으로 향하고 있어야 했다. 어떤 악기나 찬양대도 없이 회중은 앉은 채로 시편 찬송을 불렀다. 이 때 대체로 학교 교장 선생이 강단 밑에 있는 선창자 자리에서 찬양을 인도하였으며 회중은 그의 인도에 따라 몇몇 시편 곡조에 맞추어 찬양하였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예배의 첫 부분은 이 선창자에 의하여 인도되었었다. 세 번째 종이 울리면 검은 가운을 입은 목사가 등단하였고 기도하고 설교를 하였다. 설교는 아주 길었고 강단에 있는 30분용 모래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였다. 설교는 아주 신중하게 준비하였으나 설교할 때는 원고가 없이 설교하였다. 청중들에게 약간의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도록 요구하였으며 신학적 내용도 알고 있도록 하였다. 로마 교회에 대한 공격과 정치적인 문제들을 설교에서 심심찮게 다루었다. 설교 본문은 특별한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성경의 한 단락 정도 되었고 매 주마다 이어서 강해하는 설교였었다. 성경 한 권이 몇 달씩 설교되기도 했던 것이다. 본문은 당회록에 기록되었었다.
교회당들은 산뜻한 건물이 아니었다. 예배 의식도 교회당처럼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시편 찬송을 부를 때는 자리에 앉아서 했으며 대표 기도할 때에 회중은 일어서서 함께 기도했으며 이 기도는 긴 기도였고 내용에 있어서 성경적이고 즉흥적인 기도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오랫동안 목사가 하는 설교 외에 성경을 한 장 읽고 그 말씀을 설명하는 일종의 강좌가 예배 시간에 있었다. 오후 예배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요리문답 공부를 시켰다. 헌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드렸으며, 때로 공공시설의 수리나 다리 건설 및 노예를 속량하기 위한 헌금도 드려졌다.
주일은 장로교나 감독교회가 다 엄격하게 지켰다. 공 예배 지침서에 언급된 것을 보면 이와 같다. ‘주일은 성도들의 안식일로서 주님께 성결한 날로 지켜져야 한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목적에 따라 온 종일 불필요한 노동으로부터 거룩한 휴식이 있어야 하고 운동이나 오락뿐 아니라 모든 세속적인 말이나 생각을 억제해야 한다.’ 당회는 모든 성도들의 행동들을 감독해야 하고 개개인들은 주일에 일하거나 장사하거나 오락을 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술 마시는 것 때문에 제재를 받았다.
세례는 교회당 안에서 거행되었고 세례 용기는 강단 옆에 달려 있는 고리에 걸어 놓았다. 결혼식도 엄숙하게 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 있어서 하관시에는 예배가 집전되지 않았다. 당회는 관을 덮는 천을 제공하였고 장례행렬이 지나갈 때 손에 든 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성찬식은 매우 특별한 행사였다. 이 예식은 일 년에 한번 또는 두 번 거행되었는데 성찬식이 임박해 오면 목사는 교구의 모든 지역을 심방하면서 성도들의 영적 지식과 상태를 점검하였다. 성찬 참여자는 적어도 사도신경과 십계명 및 주기도문을 암송할 수 있어야 했다. 성도들의 행동이 점검되었다. 누가 이웃과 불화하고 있는지 당회는 파악하고 화해시키며 끝까지 화해하지 않을 경우 성찬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장로들은 성경 지식과 행동 점검에 합격한 성도들에겐 납으로 만든 성찬 토큰을 나누어주었고 성찬식에 거행되는 주일에 이 토큰을 가지고 오는 자라야 교회당 중앙에 마련된 성찬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들에게 떡과 잔이 돌려졌다. 이 성찬기간은 대체로 두 주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 옮겨 간 자는 당회에서 이명서를 받아 가야했다. 이러한 성찬식은 18세기에 와서는 이웃 교회들의 성도들이 대거 참여하는 등 그야말로 영적 대 부흥이 있게 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7세기 성찬식 전 날은 대체로 금식하며 준비하였다. 그리고 성찬이 끝나면 월요일과 화요일에 성찬 감사 예배가 있었다. 이때는 대체로 말씀 사경회 성격이 짙었고 이웃 교회 목사들이 협력하였다.
2. 평신도들의 생활
그 당시에는 주일학교가 없었다. 종교개혁자 존 낙스의 ‘한 마을에 한 학교, 한 교회 운동’에 힘입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시켰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편 찬송을 배웠으며 주일이면 부모와 함께 교회에 나왔다. 학교 과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 과목이었고 대개 담임목사가 가르쳤다. 교회에서 사용된 성경은 제네바 성경이었으나 1611년 제임스 성경이 나온 후로는 점차적으로 제임스 번역본을 사용하였다. 어린이들은 칼빈의 요리문답을 배웠었으며 후에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만든 소요리 문답이 가르쳐졌다. 예배 시간에 한 소년이 요리문답 질문을 하면 다른 소년이 답하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어른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집에서 그 주일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고 답해야 했다. 그리하여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잉크병을 가지고 와 목사의 설교를 받아 적어야 했다. 그래야만 집에서 부모들이 물을 때 아이들이 설교 내용을 잘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마쳐질 무렵에 목사는 종종 주중에 잘못된 행동을 하여 당회에 보고된 사람들에 대한 공개적인 책망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예배 시간 내내 일종의 ‘참회석’에 앉아 예배해야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잘못된 죄를 범했으면 하나님의 사유하심이 확증될 때까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타나야만 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하여 깊이 뉘우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몸에 베 한 조각을 걸치고 있기도 하였다.
당회는 단순히 교인들의 도덕적 행동들만 감독한 것이 아니라 미신적인 것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거룩한 우물물로 간주하는 장소를 순례하는 행위들, 자기 땅 한쪽 구석을 경작하지 않고 귀신에게 바치는 행위들, 창이나 방패 혹은 열쇠나 성경을 가지고 마술을 행하려는 것과 같은 미신들을 척결하려고 애를 썼다. 모든 사람들이 마녀를 믿었다. 그리하여 당회는 이웃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에 마술을 걸거나 질병을 유발시키는 자라고 의심받는 늙은 노파들을 때때로 조사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마녀로 낙인 되어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마지막 마녀 사냥은 1727년에 있었다.
당회는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도 하였다. 당시 대부분이 가난하였기 때문에 헌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불량 주화들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돈들이 자주 교회 헌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대체로 헌금은 꼭 돌아봐야 할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돈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교회는 상당한 구제헌금을 지니고 있었다.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고아, 과부, 정신적 결함이 있는 자들이 당회의 후원을 받아야 했다. 가끔 멀쩡한 사람들이 걸인이 되어 마을 외딴 곳에 살면서 행인들에게 겁을 주곤 하였기 때문에 당회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하여 종종 건장한 청년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걸인들은 구걸에 대한 허가로 몸에 뺏지를 달고 있어야 했다. 워터 스코트 경이 쓴 ‘에디 오킬드 츄리’ 라는 책에서 이러한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교회는 가정 예배를 권장하였다. 대체로 성도들은 교회의 지도하는 대로 가정에서 예배하였다. 시편 찬송을 불렀으며, 성경을 한 장 읽었으며 기도하였다. 총회는 1647년에 가정예배 지침서를 발간하여 장로들에 의하여 각 가정에 배포하였다. 스코틀랜드의 가정예배광경이 가장 잘 묘사되어 있는 것은 로버트 번스 시인이 쓴 <Cotta’s Saturday Night>라는 글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실지 18세기 장면이다.
교구에서 신앙생활이 잘 진전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노회가 정기적으로 교구들을 방문하면서 점검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교구 목사는 노회 감독관들에게 장로들에 대하여 학교 선생들에 대하여, 교구 직원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들을 받았다. 장로들은 목사에 대하여, 목사의 성격에 대하여, 설교와 심방 사역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다. 교회 건물 상태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현황 및 교육을 위한 재정지원과 예배, 성도들의 출석률, 성찬기와 성찬 예식 참여 문제들도 질문의 대상들이었다.
정리/신춘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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