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아니라 설교자” 강단 사역에 힘썼던 17세기 목회자들

<창간31주년 기획특집·종교개혁 505주년 기념 특집> 개혁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목사의 주된 업무는 설교로 인식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에선 ‘신앙 강좌’ 흥행하기도
당시 설교자들 신학공부 위해 오랫동안 훈련 받아
탁월한 능력 나타낸 설교자의 시대로 보는 시각도

기독타임스 | 기사입력 2023/07/02 [16:14]

“사제 아니라 설교자” 강단 사역에 힘썼던 17세기 목회자들

<창간31주년 기획특집·종교개혁 505주년 기념 특집> 개혁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목사의 주된 업무는 설교로 인식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에선 ‘신앙 강좌’ 흥행하기도
당시 설교자들 신학공부 위해 오랫동안 훈련 받아
탁월한 능력 나타낸 설교자의 시대로 보는 시각도

기독타임스 | 입력 : 2023/07/02 [16:14]

▲ Z 방향으로 윌리엄 틴데일(영국), 조나단 에드워드(미국), (중간)존 낙스(스코틀랜드), 마틴 루터(독일), 존 칼빈(스위스).     ©

 

3. 17세기 목사들

 

설교는 목사의 사역 중 가장 주요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참된 설교야말로 참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라고 존 낙스는 믿었다. 낙스 자신도 영혼을 움직이는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깨어나는 사람들은 500명의 트럼펫 주자가 동시에 불어댈 때 그 소리에 의하여 잠에서 깨어나는 자들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그 이후 로버트 부르스(Robert Bruce,1554-1631) 목사는 에든버러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으며 전 지역을 통해서 큰 불빛을 발한 설교자였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그의 선포된 말씀과 더불어 나타났다. 이처럼 17세기 설교자들은 대다수가 탁월한 설교자였고 복음의 진수를 온 천지에 진동케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증거하였다. 

17세기 목사들은 신학 공부를 위하여 오랫동안 훈련을 받았다. 라틴어로 강의를 들었고 시험을 치렀다. 교회 논쟁사항들을 가지고 교회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이 그들의 설교 사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들의 설교에는 분명한 대지들을 가지고 전파하고자 하는 말씀을 논리 정연하게 증거 하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목사들은 한결같이 본문에서 파생한 교리에 관한 요점들을 제기하면서 논리에 의하여 그 교리적인 요점들을 입증하려고 하였으며, 교리적인 가르침을 분명하게 하는 사용방안(use)들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의 실제 삶에 적용하였다. 그것은 교훈과 책망, 훈계와 위로, 자기점검을 위한 적용이었다. 

또한 그들의 설교는 성도들의 영적 삶을 위한 적절한 지침들과 도움을 주는 내용들을 가지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설교였다. 이러한 설교를 성도들은 잘 순응하여 영적 성장을 도모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설교를 다 잘 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지루하게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교구 직원들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잠자고 있는 자들을 깨우기도 하였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모든 시대에 다 재미없고 비효율적인 목사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시된 장로교 목사의 웅변력’(Presbyterian Eloquence Displayed, 1692)은 그 시대의 설교에 대한 풍자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그런 비난을 받는 설교자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탁월한 능력을 나타낸 자들이었다. 잉글랜드나 심지어 불란서에서조차도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었던 설교자들의 시대였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그 시대의 설교자들을 그 어느 시기 때보다도 더 자랑할 만한 분들이었다. 

예를 들면, David Dickson(1583?-1663) 목사는 영혼을 깨우는 놀라운 설교자였으며, 매우 감동적이고 강렬한 설교자였다. John Livingstone(1603-72), James Guthrie(1612-1661), Samuel Rutherford(1600-1661) 목사 같은 이들은 언약 사상을 굳게 붙든 언약도들의 지도자들이었다(루터포드 목사의 사역에 대해서는 “진리의 깃발” 제 45호 참고). William Guthrie(1620-1665) 목사는 신비적인 유형의 사람이었지만 복음 선포에 있어서는 호소력이 탁월한 설교자였다. Andrew Gray(1633-1656) 목사는 글라스고에 있는 인너 하이쳐치(Inner High Church)예배당을 사람들로 가득 메운 설교자였다. 

제임스 더람(James Durham, 1622-1658) 목사는 그레이 목사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많이 받은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시내 외각 교회당에 군중들이 가득 들어서게 한 설교자였고 그의 설교를 들으려 모인 숫자는 그레이 목사에게 모여든 숫자보다 더 많았었다. 

그 모든 위대한 설교자들 중 한 분은 휴 비닝(Hugh Binning,1627-1653) 목사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저술들은 매우 지적이었고 독창적이었으며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깊이 한 것들이었다. 

언약도들 외에 감독교회 설교자들 중에도 유명한 설교자들이 있었는데 갈로웨이 주교였던 윌리암 쿠퍼(William Cowper, 1568-1619)와 성 니콜라스 교회 감독인 James Sibbald(1647년에 아일랜드에서 죽은 자로서 언약 사상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한 7명의 애버딘 박사들 중 한 사람이었음) 및 Robert Leighton(1611-1684)과 그의 친구 제임스 Nairn(1629-1678), Laurence Charteris(1625 -1700) 등이 그들이다. 이 외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후기 언약도 운동사의 주역들인 옥외집회 설교자들이다. 알렉산더 패단(Pedan, 1626-1686)목사, Richard Cameron(1648-1680) 목사와 어쩌면 최초로 스코틀랜드에서 오늘날의 주일학교 형태를 가지고 어린이들을 위한 탁월한 사역을 감당한 John Brown( of Priesthill, 1627-1685) 목사, Donald Cargill(1627-1681) 목사 및 언약도들 중 마지막 순교자인 제임스 렌윅(James Renwick, 1662-1688) 목사 등이다. 이들은 정부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언약 사상을 붙들고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수장 권을 인하여 핍박과 순교의 고난을 친히 감당한 지도자들이었다. 

이 외에도 스코틀랜드 교회를 교회되게 한 영향력을 발휘한 작품들을 남긴 자들이 많이 있다. 조지 헛치슨(of Edinburgh, George Hutcheson, 1615-1674) 목사이다. 그는 언약도였으나 왕 문제로 인하여 지지자들과 항거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 지지자들에 가담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감독제도에 서명하지 않는 것 때문에 1662년에 목회지에서 추방당한 훌륭한 설교자였다. 그가 남긴 요한복음 주석과 욥기 주석 등은 스펄젼 목사가 아주 높이 평가한 작품들이었다. 

헛치슨과 Kilwinning의 James Ferguson

(1621-1667) 목사는 데이빗 딕슨과 제임스 더람 목사들과 견주는 훌륭한 목사요 성경 강해자들이었다. 그 외에 학식이 많은 신학자들 중에는 글라스고와 에딘버러 대학 총장을 지낸 로버트 보이드(Boyd, 1578-1627), 7명의 애버딘 박사 대표인 John Forbes(1593 -1648)가 있다. 논쟁적인 저자들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아주 박식하였다. 

가장 어린 나이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 스코틀랜드 대표로 참석한 조지 길레스피(Gillespie,1613-1648)와 그의 형제로서 글라스고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항거자들을 이끈 패트릭 길레스피(1617-1675) 목사가 그 대표자들이다. 

역사학자로 명성을 날린 장로교도 데이빗 칼더우드(Calderwood,1575-1650)와 감독주의자인 존 스포티스우드(Spottiswoode, 1565-1639) 등이 있었다. 책으로서는 ‘납달리’(1667)나 ‘A Hind Let Loose’가 핍박받고 있는 언약도들의 내적인 심령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애버딘의 젊은 교수였던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l, 1650-1678)이 쓴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란 책은 전혀 다른 유형의 경건 서적이었다. 

이 시대에는 목사들에 의하여 아주 탁월한 소책자들이 많이 발간되었던 시대였다. 설교집들도 상당히 많이 출간되었었다. 이 시대의 목사들은 무엇인가 할 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할 말들을 능히 표현하는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 모든 저술들은 문학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것들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리고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은 관심을 끈 것들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시대에 대한 그들의 예리한 관찰력과 놀라운 성실성 및 강한 확신에 찬 그들만의 모습을 그려내기에는 충분한 것들이었다.

4. 17세기 강단 사역

 

17세기 스코틀랜드에 있어서 강단 사역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요소였다. ‘설교 시간’ 하면 대체로 예배시간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가장 핵심 요소였다. 이러한 사상은 칼빈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교회의 참된 표지 역시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첫째였고 올바른 성례와 정당한 권징 시행이 그 뒤를 이은 것이었다. 실지로 종교개혁 시대 이전의 교회에서는 하나님 말씀 선포사역이 결핍되어 있었다. 성직자들의 무지가 극에 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재발견은 자연스럽게 말씀에 대한 강해를 요구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자고 했을 때 지도자들이 발견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 및 기독교회의 확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설교 사역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에서 설교야말로 교회 개혁의 핵심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낙스가 다 위대한 설교자였고 제사장이라기보다는 선지자들이었다. 르네상스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신선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자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제는 계시와 진리 및 복음에 대한 관심이 최전방에 나서게 되었다. 목사는 이제 더 이상 사제의 기능을 감당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설교 장로(preaching elder)로 인식하게 되었다. 모든 성도들은 성찬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그 전에 세례 받은 여부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 정도를 점검하였다. 예를 들면 십계명과 주기도문 및 사도신경 같은 것을 물었다. 

목사는 높은 지식수준이 요구되었으며, 임지에 부임하게 되면 성경과 교회당 열쇠가 주어졌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기 위하여 그리고 설교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교육 시설을 준비해야 한다고 느꼈다. 설교는 칼빈의 경우처럼 대체로 강해 설교였다. 설교 없이는 성례가 집전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기도와 찬송가운데서도 복음주의적인 가르침 등을 주입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흥행했던 신앙 강좌(Lectureships)는 목사의 가르치는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다. 따라서 종교개혁 이후 목사의 주된 업무는 설교하는 것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 작성과 전달 사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신춘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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