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대성당이 있는 ‘이스탄불’ 비잔틴제국시대 수많은 유적 즐비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교회 순례(2)
1천100년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

기독타임스 | 기사입력 2023/09/14 [11:14]

소피아 대성당이 있는 ‘이스탄불’ 비잔틴제국시대 수많은 유적 즐비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교회 순례(2)
1천100년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

기독타임스 | 입력 : 2023/09/14 [11:14]

▲ 소피아 성당 전경     ©

 

▲ 소피아 성당 내부     ©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 이 둘은 결코 만날 수 없으리.”

영국의 시인 키플링(Kipling)은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이 이어져 만나는 곳이 있다.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기독교의 3대 제국(로마, 비잔티, 오스만 터키)의 중심 수도로서 무려 120여 황제들이 이곳에서 변천에 따라 본래의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그리고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통합측 광주노회 영광시찰회와 함께한 이번 순례는 필자로서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왠지 설레는 감동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차분했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의 경제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스탄불은 오랫동안 개발된 도시라서, 시 중심부는 주로 상업지로 개발되어 있고 기업들이 몰려 있는 곳은 주로 도시의 외곽 지역이다. 인구는 1572만 명 정도로, 러시아의 모스크바(인구 약 1,301만)보다 더 많아 유럽 최대의 도시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1572만 전체 인구의 1/3은 보스포루스 해협 동안의 아시아 부분에 살고 있어서 ‘유럽 대륙’ 최대의 도시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면도 있다.

본래 ‘이스탄불’은 테오도시우스 성벽 내에 위치한 구역(오늘날의 파티흐구)만을 의미했으나튤립 시대에 베이오을루구가 추가된 것을 시작으로 동서로 영역을 확대에 1923년 공화국 수립 당시에는 아나돌루 지역의 위스퀴다르구와 에윕, 바이람파샤, 제이틴부르누구가 편입된 상태였다. 여기에 또 면적확대가 이루어져 오늘날에는 서쪽의 차탈자구와 동쪽의 실레구, 남쪽의 아달라르 구가 포함된 어마어마한 영역이 되었다. 한때는 마르마라 해 남쪽 건너편의 항구도시인 얄로바까지 이스탄불 시역에 들어갔으나, 1995년 떨어져 나갔다.

 

 

▲ 유람선에서 본 모스크쪽 이스탄불     ©

 

이스탄불의 생활권은 크게 4곳으로 구분되며, 베드타운이 밀집한 바으즐라르구와 인접한 아브즐라르, 바흐첼리에빌레르구를 포함한 유럽 쪽 서부 도심(이 세 구만 합쳐도 인구가 250만이다), 전통적인 이스탄불이었던 파티흐, 베이오을루구와 그 주변부에 위치한 제이틴부르누, 바이람파샤, 에윕, 시슐리, 베식타쉬(Beşiktaş)구를 포함한 주도심, 아나돌루 지구의 중심지였던 위스퀴다르, 카드쾨이와 주변부에 위치한 위므라니예, 체크메쾨이를 포함한 아나돌루 해변 쪽 도심, 나머지 카르탈, 아타셰히르, 말테페, 펜딕구를 포함한 아나돌루 쪽 동부 도심으로 구분된다. 이 외에 변두리에 위치한 차탈자나 실레 같은 면적 큰 구들은 아직 한산해서 농사도 짓고 있고, 심지어 마차도 볼 수 있는 동네다.

이스탄불은 교회사적으로는 서기 500년대 이래 오늘까지 동방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보스포루스 해협 옆에 있던 무명의 도시 비잔티움을 세계 무대의 한 가운데로 올려놓은 사람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서기 320년대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황제에 올라 절대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핍박과 순교로 점철되었던 기독교 수난의 역사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광경     ©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통치하는 로마제국은 동방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황제는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리적 중심지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가 새로운 수도로 정한 곳은 비잔티움이었다. 그는 6년간에 걸쳐 그곳에 제국의 수도로써 손색이 없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서기 330년 장엄한 의식과 함께 천도가 이뤄졌다. 새 수도의 이름을 ‘신로마’라고 명명했으나 사람들은 황제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15세기 중엽 오스만 터키 군대에 함락될 때까지 약 1100년동안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비잔틴제국시대의 수많은 유적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것은 소피아 대성당이다. 

비잔틴시대 건축예술 중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평가되는 소피아 대성당을 서기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뉴스 황제의 명으로 건축되었다. 건축왕이었던 이 황제는 성지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예수 탄생교회를 시내산 기슭에는 성 카타린 수도원을 세우기도 했다. 

 

▲ 가이드와 차 한 잔을 나누는 정은덕 목사와 필자     ©

 

이런 역사의 뒤안길을 더듬으며 소피아 대성당을 방문했다. 성당은 대정원 중앙에 높이 56m에 달하는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내부에 들어가 보니 이 대성당은 천장을 둥근 돔으로 만들어 교회 건축양식에서 새 장을 열었다. 

특히 대성당안의 모든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 성화는 세계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325년, 그 유명한 삼위일체 논쟁으로 니케아회의가 바로 이 소피아 대성당에 모여 니케야 신경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가 모였던 현장에서 보니 그때 당시의 광경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라 감개무량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1453년은 비잔틴제국은 비극의 해였다. 오스만 터키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1000년 이상의 영화를 누렸던 권세가 단 53일의 공격에 허무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황제는 제일 먼저 소피아 대성당으로 달려갔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간 황제는 오랫동안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웅장한 아름다움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이슬람교도였으나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밑에서 이 대성당은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바뀌게 되었다. 대성당 꼭대기의 십자가는 이슬람교의 초생달 표지로 대체되었고, 모자이크로 된 기독교 성화는 회칠을 해서 지워버리기는 했을망정 성화를 부수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회칠을 기술적으로 제거하면 모자이크 성화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히포드럼 광장에 하늘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     ©

 

오늘날 여전히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남아 있는 소피아 대성당 안에서는 1931년 이래 60년 이상 성화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앞으로 박물관으로 전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소피아 대성당에서 나와서 히포드룸, 블루 모스크, 아르케오로시, 그랜드 바자(시장)에서 쇼핑을 마친 후 유람선을 타고 말마라 해협을 돌아보며 튀르키예와 이스탄불을 머리에 그렸다.

그 그림은 △아야 소피아 모스크(Ayasofya Camii, 성 소피아 성당)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Sultan Ahmet Camii, 블루 모스크) △톱카프 사라이(Topkapı Sarayı, 톱카프 궁전)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등.

튀르키예는 지중해 동북쪽에 연해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영토를 갖고있는 나라다. 수도는 앙카라이며, 주요 인종은 지중해-튀르크인이며 튀르크어를 사용한다.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공존하는 개발도상국 경제체제를 취하고 있으며, 산업·서비스 부문이 농업보다 우세하다. 목화나 담배 같은 환금작물은 수출용으로 중요하다. 전국토의 1/4을 차지하는 이 삼림지대는 지금까지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국호는 2021년까지 ‘터키’였으나 2022년 ‘튀르크인의 땅’을 의미하는 ‘튀르키예’로 변경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1949년 8월 대한민국을 승인했으며, 1950년 6·25전쟁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우방국으로서 1957년 3월 8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후 한-튀르키예 양국은 2012년에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되었다.

편집국장/ 신춘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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