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선교1호 이기풍 목사 일대기

운영자 | 기사입력 2018/04/07 [22:22]

제주선교1호 이기풍 목사 일대기

운영자 | 입력 : 2018/04/07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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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선교1호 이기풍 목사 일대기

 

제주도 제1호 선교사는 자국민 목사인 이기풍 목사다. 본보는 창간11주년을 기념하여 제주선교 110여 년 전의 제주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신 이기푼 선교사의 일대기를 본보에 연재한다. 먼저 이 글은 이기풍 목사님의 막내 따님이신 이사례 여사가 집필한 ‘이기풍 목사의 삶과 신앙’에서 발췌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이기풍 목사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일부 연도와 사건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편집자 주

 

1. 평양의 건달

이기풍 목사는 1868년 11월 21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홍경래난 당시에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할 뻔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평양성을 빠져 나와 황해도 구월산에 피난을 하였다가 그 곳에서 숨을 거둔다.

이 후 이기풍 목사의 부친은 다시 평양으로 이사를 와 농민으로 행세하며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기풍 목사가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후에 이기풍 목사가 마펫 선교사와 인연을 맺게 되고, 또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아무튼, 이기풍 목사는 어려서부터 재치 있고 슬기로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외웠으며, 열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서 붓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묵화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재주는 당시 상황으로서는 올바로 사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증조부의 일로 인해 관료가 되는 길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외세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인하여 조선이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곱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청년이 된 이기풍은 성품 또한 괄괄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혈기가 왕성해지자 사나운 기운을 여지없이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술은 물론이고 박치기의 명수로서 아무도 이기풍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돌팔매질을 잘하여, 매년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石戰에서 동편 대장을 맡기도 하였다. 하루는 거나하게 술이 취해서 건들거리며 평양 거리를 활개 저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마침 평양좌수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평소 도도하게 말을 타고 가는 그런 행렬을 싫어했던 이기풍은 말을 탄 평양 좌수가 자기 앞을 지나가자, 달려들어 다리를 잡고 좌수를 땅바닥에 내동이쳐 버렸다. 이 사건으로 이기풍은 꼬박 석달을 목에 형틀을 쓰고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2. 마포삼열 선교사를 돌로 치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으로 서양 오랑캐의 침입을 크게 경계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 무모한 이기풍도 서양 오랑캐를 매우 싫어하였다.

1885년 4월 5일,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우리 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며,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평양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이기풍은 집을 나서다가 생전 처음 보는 양코배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보기 드문 체구에다가 도도한 몸짓으로 가슴을 내밀고 가는 꼴을 보고 비위가 거슬렸다. 이 분이 마포삼열 (S. A. Moffett) 선교사였다. 이기풍은 마포 선교사의 뒤를 따라가 집을 확인하고, 석전패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저 양코배기가 무엇하러 우리 나라에 왔을까? 저것들도 날도둑놈들이 아닌가? 그렇다. 저놈들을 우리 나라에서 하루바삐 몰아내자." 이기풍은 대 여섯 명의 친구들과 마포 선교사의 집으로 떼지어 몰려가, 집안으로 신나게 돌을 우박 같이 쏟아 부었다. 집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돌을 다 던져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직접 거만한 양코배기와 대결하지 못한 것이 분하였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장터를 지나던 이기풍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확인하다가, 그 양코배기가 책을 들고 서투른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반사적으로 이기풍은 발 밑에 있는 돌을 들고 다가갔다. 낌새를 알아챈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자, 이기풍은 오른 팔을 두어 번 돌리고 돌을 날렸다. 날아간 돌은 마포 선교사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다. 마포 선교사는 그 자리에 거꾸러졌고, 삽시간에 낭자하게 흐르던 피가 땅으로 배어들었다. 군중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이기풍도 시치미를 떼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밖에도 한참 건축하고 있던 장대현 교회를 때려부수기도 하는 등,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보고 수 차례 박해를 가하기도 하였다.

3. 예수의 품으로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과 중국은 평양, 아산, 성환 등지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평양성에서 전쟁이 점차 격화되면서 집집마다 말할 수 없는 기근으로 온 장안이 기아상태에서 허덕이게 되었다. 이기풍은 식량도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당장 활동을 못하고 방안에 쳐박혀 있는 것이 답답하였다. 그래서 평양성을 빠져 나와 원산으로 간다. 그러나 원산에서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얼마안가 있는 것 마저 팔아야하는 안타까운 신세가 되었다. 과거의 기고만장했던 패기도 다 사라지고 풀이 꺾인 채 삶을 개척할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게된, 이기풍은 친구들의 권유로 담뱃대에 그림을 새겨서 팔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그림을 그린 담뱃대를 한 묶음 들고 힘없이 걸어가다가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보게 되었다. 이기풍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평양에서 돌로 친 양코배기의 화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이기풍의 양심은 괴로워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왜 죄없는 사람을 돌로 쳤을까? 그 사람은 왜 돌을 맞았어도 반항을 하지 않았을까?' 언제든지 만나면 사과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았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채 집에 돌아와서 마루에 누워, 평양에서 돌팔매질로 양코배기의 턱을 깨어 피를 흘리게 했던 일을 한참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는데, 이런 소리가 들렸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도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생전 눈물을 흘릴 줄 몰랐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콧물과 뒤범벅이 되어 한없이 흘러내렸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서 아무리 가슴을 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통곡을 해도 이 죄는 누구에게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생각다못해 전에 자신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던 자(김석필)의 집에 달려가 꿈 이야기와 죄의식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낱낱이 고백하였다. 그 말은 들은 김석필은 이기풍의 손목을 잡고 스왈른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김석필은 얼떨떨해 있는 이기풍을 대신해 자초지정을 차근차근 털어놓는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왈른 선교사의 얼굴은 희색이 만면해지더니 초면인 이기풍의 손을 잡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스왈른 선교사는 서툰 조선말로 이기풍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분명히 당신을 예수님이 귀하게 쓰실 징조요, 당신 죄는 예수님이 다 사하여 주셨소, 기뻐하시오"

이기풍은 또 스왈른 선교사에게 평양에서 마포 선교사에게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맹세하였다. 이후부터 이기풍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완전히 예수에 미쳐버렸다. 때는 30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이었으니 피곤한 줄을 몰랐다. 어떻게나 열심히 전도를 하고 다녔는지 하루는 거처하고 있는 집주인에게서 쫓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기풍에게는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원한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입은 이 감격을 무슨 방법으로 표현해야 될지 몰라 이기풍의 젊은 가슴은 성령의 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4. 최초의 선교사

스왈른 선교사를 도우며 열심히 전도를 하던 이기풍은 청일전쟁이 끝난 후, 스왈른 선교사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온 이기풍은 마포 선교사를 찾아가 자기가 과거에 집안으로 돌을 던지고 턱에 상처를 낸 난봉꾼이었다는 것을 낱낱이 고하고, 그 후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노라고 흐느끼며 자기 죄에 용서를 구했다. 마포 선교사는 감격스럽고 기이한 사실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릴 뿐이었다.

이후 이기풍은 1901년까지 매서(성경책을 파는 사람, 나중에는 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인 권서로 불림)로서 함경도에서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서 1907년까지는 스왈른 목사를 따라 황해도의 안악, 문화, 신천, 장연, 해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업무를 돕는 조사(helper)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포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1903년경(연도가 정확하지 않다)에 입학하게 된다.

이기풍의 신학교 생활은 스왈른 선교사와 마포 선교사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 이기풍은 복음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시켜야 했던 권서 경험을 통해 해박한 성경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여, 목사후보생으로 추천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신학교에 입학한 이기풍은, 대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하였던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서경조, 한석진, 길선주, 양전백, 송린서, 방기창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 목사 안수를 위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노회가 설립되었으며, 목사 안수 다음날 속회된 노회에서, 마포 선교사는 이기풍 목사에게 회중을 대표하여 참회기도를 인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3일째 회의가 열린 9월 19일에는, 7인의 목사가 탄생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전도위원회의 결의를 만창일치로 통과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기풍 목사는 우리 나라 최초로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평양의 술 주정꾼이 마포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쳤으나, 회개하여 목사가 되어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미국 장로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한국교회사> 첫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5. 제주도 사역

첫 선교사

선교사는 일반적으로 자기 나라가 아닌 나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된 사람을 일컫는다. 이기풍 목사님을 우리 나라의 첫 선교사로 부르는 것은 당시 제주도가 해외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북간도나 중국, 일본 등지에 비해서 선교하기가 더 힘든 곳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언어도 육지와 완전히 달랐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뱀을 숭배하는 등 미개한 풍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또한 대원군이 천주교 신자를 무자비하게 처형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전도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이기풍 목사님도 제주도 파송이 결정된 뒤 마음이 많이 어려웠다고 한다. 영적인 힘을 얻기 위하여, 제주도로 떠나기 전까지 마포선교사님 집과 신학교에 자주 들러 기도로 무장하였으며, 평양 성내의 교인들도 이기풍 목사님의 가족과 제주도 선교사업을 위해 꾸준히 새벽기도를 올렸다. 훌륭한 목사님 뒤에는 항상 훌륭한 사모가 있는 모양이다. 이때 윤함애 사모가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그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겠소"라며 설득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첫 열매는 해녀

이기풍 목사가 우려했던 것처럼 제주도 사역은 출발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기풍 목사부부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을 거쳐 목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이기풍 목사는, 살림 준비가 되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제주도행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 배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난파되고, 함께 탔던 모든 사람들이 죽고, 이기풍 목사만 헤엄쳐 추자도에 상륙하여 생명을 건졌다. 그후 추자도에서 다시 제주도로 배를 타고 들어갔다. 전도의 사명만을 가지고,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제주도에 도착했지만, 전도는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으며, 또한 천주교인 학살사건의 영향으로 모두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볼 뿐 누구하나 대꾸해주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이기풍 목사는, 우선 제주도를 익히고자 조랑말을 구입하여 한라산을 한 바퀴 돌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인적이 드물어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고, 또 만난다 해도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음식물을 섭취하기도 힘들뿐더러, 아무도 방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아, 한라산 기슭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거나, 마굿간에서 잠을 잘 때가 많았다. 그러나 영양부족에 의한 고통과 함께,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전도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서, 이기풍 목사는 바닷가로 발을 돌린다.

그러나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였던 이기풍 목사는 얼마안가 모래사장에서 정신을 읽어버리고 만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누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해녀가 살고 있는 방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처음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 곳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이기풍 목사는, 해녀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은 해녀의 마음을 움직여, 이기풍 목사에게 제주도에서 첫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고난의 열매

이때부터 이기풍 목사는 본격적으로 전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시로 조랑말을 타고 한달 동안 제주도를 일주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였다. 주로 밭농사를 하는 제주도에는, 해녀들이 많기 때문에, 밭에서 일하는 남자들의 일손이 항상 부족하여, 일을 도와주러 왔다고 하면 환영을 받았다. 이기풍 목사는 일할 때 입는 바지저고리를 항상 갖고 다니면서, 며칠 동안 열심히 일을 도와주고, 서로 친하게 되면 비로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전도를 하였다.

또 한번은 제주도에 큰 홍수가 나서, 가재도구와 돼지, 농작물 등이 거센 물살에 휩쓸려 내려간 적이 있었다. 이때 사람들이 뗏목에 탄 채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것을 목격한 이기풍 목사는 목숨을 걸고 다섯 사람을 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동안, 그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 둘 씩 열리면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열매는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각 집에서 숭배하고 있는 '구렁이 때려잡기 운동'을 하다가 몇 차례나 두들겨 맞아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하였다. 또 제주도 부임 초기에는, 제주도의 풍속과 형편을 알리는 보고서를 평양에 보낸 것이, 한성신문에 실리는 바람에, 제주도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는 오해를 사, 청년들로부터 목이 졸려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전도초기에 이기풍 선교사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영육이 모두 약해진 이기풍 목사가 생각다 못해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평양으로 보내줄 것을 편지로 요청하게 되었다. 약 2개월 후에 받아본 답장에는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 노력하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이 편지를 읽은 이기풍 목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이기풍 목사는 기쁨이 넘쳐흘렀으며 다시는 좌절하지 않았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었다. 평양으로 돌아가려고 쌓아 놓았던 봇짐을 다 풀어버렸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제주도에 많은 복음의 씨를 뿌렸다. 이 기간 중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성안교회를 비롯하여, 금성, 삼양, 성읍, 조춘, 모슬포, 한림, 용수, 세화 등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참고로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제주도의 교인은 410명, 예배당 3개, 기도회처소가 5곳, 매주 모이는 남녀가 300여명에 이른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기풍 목사의 이러한 성과는, 한국 장로교가 1912년 첫 총회를 조직하면서,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지금까지의 선교 받는 교회에서 선교하는 교회를 변신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6. 호남지역 사역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부임 후 7년간의 선교사역을 마치고 1915년 안식년을 얻어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약 1년간의 안식년을 보낸 후 1916년에 전라남도 광주 북문안 교회의 초대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918년에 실음병(목소리가 나지 않는 병)을 앓게 되면서 북문안 교회의 목사직을 사직하였다. 약 1년만에 병이 치유되어 다시 목소리를 찾게된 이기풍 목사는 1919년 10월부터 순천읍 교회를 담임하면서 다시 목회의 길을 가게 된다.

또한 이기풍 목사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교계의 지도자였다. 1920년에는 전남 노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그해 10월에는 제 9 회 총회에서 부회장, 그 다음해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제 10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는 자신의 위상과 업적에 맞게, 부흥하고 안정된 교회에 부임하여 그 곳에서 평생 목양하는 그런 목자가 아니었다.

이기풍 목사는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이나 황해, 평안도 지역의 큰 교회에서 대접받아가며 목회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옛날 선교사와 복음을 핍박했던 그런 버림받을 인간이 십자가와 그 보혈로 구속함을 받게 되었던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아직도 복음의 빛이 잘 전해지지 않는 호남지방의 시골교회를 자청해서 찾아갔다. 또한 제주도에 파송된 이래, 당시로서는 한 노회구역이었던 전라노회, 그 것도 전남지역을 평생 벗어나지 않았다.

이기풍 목사는 1916년부터 1942년 돌아가실 때까지 전라노회 관내에서, 광주, 순천, 고흥, 제주, 벌교, 그리고 마지막 사역지인 여수군 남면 우학리 등지의 교회로 옮겨 다니면서, 전남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평생을 바치신 것이다.

7. 신사참배와 순교

일제는 1936년경부터 전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이에 반대하던 기독교를 탄압하여 먼저 천주교, 감리교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1938년 9월에 열린 제 27회 장로회 총회에서 강압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 기독교 전체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한다. 이때부터 개인 또는 소집단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여수 우학리에서 교회를 맡고 있던 이기풍 목사도 당연히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마침 우학리 섬 목사관 바로 뒷산에 신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섬마을 사람들이 강제로 신사참배를 가게되면 목사관 돌담을 따라 가야했다.

이 때문에 신사참배가 있는 날은 이기풍 목사는 으레 섬 주재소로 불려가 갇혀 있게 되었다. 또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죄로 쌀 배급을 받지 못해 온 식구가 감자를 먹으며 끼니를 연명해야하는 때도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는 철저한 것이었다. 자녀가 다니는 학교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하면, 당장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학교를 찾아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순천노회 목회자들이 조직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자, 일제는 1940년 11월 15일 새벽에 순천노회 목사 17명을 검거하여 투옥하여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다른 목사들이 순천 경찰서에 투옥된 것과는 달리 여수 경찰서에 감금되었으며, 당시 72세로 최고령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평소 교회에서 일본은 곧 망한다는 설교를 자주 했기 때문에, 신사참배 반대뿐만 아니라 불경죄가 더해져서 더욱 심한 고문을 받았다. 또한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스파이라는 죄까지 더해졌다고 한다.

이기풍 목사가 고령에다가 심한 고문으로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게 하기도 힘들게 되자, 일제는 광주 형무소로 이첩하기 직전, 병보석으로 일단 출감시키기로 하였다. 이때 이기풍 목사는 출감을 거부하고 16명의 목사를 석방시키기 전에는 이곳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못 나가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죽기 직전에 감옥에서 나온 이기풍 목사는 강제로 여수 경찰서에서 우학리 섬으로 옮겨졌으며 죽는 날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1942년 6월 13일 주일, 이기풍 목사는 양쪽에 부축을 받으며, 여수 남면 우학리 교회에서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하였다. 성도들에게 하나님 외에는 절대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되며, 아이들이 신사에 올라가서 놀지도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1942년 6월 20일 주일 아침 8시, 이기풍 목사는, 다시 경찰서로 들어오라는 통지를 받기도 전에, 여수 남면 우학리섬 목사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비록 옥중에서 순교하지는 못했지만, 결코 옥중에서 순교한 것 못지 않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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