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성지순례18 - 쿰란공동체1] 청정생활 토대로 형성 유대교 수도회 터전 ‘쿰란 공동체’

한 양치기가 잃어버린 양 찾아 헤매다 동굴 속 항아리 발견

기독타임스 | 기사입력 2018/10/29 [09:45]

[기획특집: 성지순례18 - 쿰란공동체1] 청정생활 토대로 형성 유대교 수도회 터전 ‘쿰란 공동체’

한 양치기가 잃어버린 양 찾아 헤매다 동굴 속 항아리 발견

기독타임스 | 입력 : 2018/10/29 [09:45]

양피지에 적힌 쿰란 텍스트 성경 사본 세상 알려지며 화제

 

 

사해의 체험을 머드(진흙) 욕과 함께 기쁨을 만끽한 후 성경의 역사적 현장을 찾았다.

 

쿰란(Qumran) 공동체.

 

북쪽 사해를 내려다보는 곳에 쿰란(Qumran) 공동체의 유적이 있다.

 

이미 예수님 시대 훨씬 이전에 선민의식과 청정생활을 토대로 형성된 유대교의 수도회(에세네파)가 있던 자리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제도화된 유대교를 거부하고 청정생활을 하며 거룩한 무리, 구원 예정자로 자처했다.

 

▲ 쿰란공동체 유적     © 기독타임스


공동체가 생활하던 곳을 복원해 놓아 당시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다.

 

수도원장이 살던 곳, 구약성경을 필사하던 작업실, 정결예식에 사용되는 물을 끌어들이던 수로와 물 저장고, 높은 망루 등.

 

공동체 건물 바로 옆에 그 유명한 쿰란 제1동굴이 있다.

 

바로 여기서 1947년 이사야서 히브리어 텍스트가 발견되었다.

 

▲ 쿰란공동체유적     © 기독타임스


쿰란 공동체가 살던 자리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저 동굴이 2천년 가까이 사람의 발이 전혀 닿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어떤 베두윈 양치기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다가 이 동굴 속 항아리 안에 담긴 양피지(羊皮紙)를 우연히 발견해, 헤어진 자기 신발 밑창으로 쓰려고 신발 수선가게에 양피지를 맡기면서부터 이 쿰란 텍스트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

 

만일 그 양치기가 양피지를 신발밑창에 신고 다녔더라면 대대로 역적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에세네파의 기원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기원전 2세기 초의 하시딤 운동이다.

 

▲ 쿰란유적지,_성경필사실     © 기독타임스


하시딤은 마카베오가 독립전쟁(기원전 166∼160)시기에 마따디아와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하에 모인 다양한 여러 그룹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헬레니즘과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에 반대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1마카 2,29).

 

하시딤은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은 지지하였지만 그들의 정치형태는 비판적이었고, 결국 요나단 마카베오(기원전 160∼143)의 통치시기에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152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알렉산더 발라스(기원전 150∼145)는 요나단 마카베오를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로 임명하였다(1마카 10,15이하)

 

▲ 쿰란공동체 식당 및 집회장소     © 기독타임스


요나단은 정통 대사제 집안인 사독 집안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통 대사제를 쫓아내고 대사제직을 찬탈하였다. 이에 쫓겨난 정통 대사제가 바로 쿰란 공동체의 창시자인 ‘정의의 스승’이다.

 

정의의 스승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유대 광야로 가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세네파의 쿰란 공동체의 시작이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는 정의의 스승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시작 되었다.

 

쿰란 공동체는 쿰란 문서에서 자신들을 ‘공동체’, ‘다수’, ‘회중’, ‘빛의 자녀들’, ‘정의의 자녀들’, ‘충실한 자녀들’, ‘경건한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등으로 표현한다.

 

공동체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생활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델로 조직 되었는데 ‘광야’라는 신학적 주제는 쿰란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즉 공동체는 율법 연구를 통해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로 가서 생활하였다.

 

쿰란 공동체의 규칙서는 재산을 공유하는 독신자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데, 그들은 흰 옷을 입었고 공동식사를 했다. 공동 식사는 공동체의 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 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성전의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쿰란 공동체에서 공동 식사의 중요한 두 구성 요소는 빵과 포도주이다.

 

▲ 사용했던 그릇들.     © 기독타임스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과 동일한 정결의 수준이 공동체에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식사에는 높은 수준의 정결을 유지하는 정식 회원만이 참석할 수 있다. 쿰란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정결례를 위한 침수 예식을 거행하였다.

 

공동체는 이 예식을 통해 자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문헌적인 증거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증거들에서도 입증된다. 즉 쿰란 공동체의 유적지에서는 제의적 정결 예식에 필요한 정교한 수리시설과 정결예식을 위한 물웅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쿰란공동체는 1세기부터 현재의 쿰란에 모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예루살렘의 동쪽으로 메시아가 올 때 가장 먼저 주님을 맞이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쿰란공동체는 로마군단 10군단 실바장군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는데, 쿰란공동체는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성경과 규율 집 필사본을 숨겨두었다(다음호에 계속)

 

쿰란에서 / 신춘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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